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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속 4군 밀영과 피어린 서정길
  1 1934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와 항일구국유격군은 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때 제4군 소속 안순복 등 4군의 조선족동지들과 가족들은 밀산현 서대림자(西大林子)에 있다가 그곳에서 80리 떨어진 양강구(杨岗沟)에 자리잡고있었다. 그해 겨울에 안순복, 허현숙(许贤淑), 리동숙, 리범숙 등 녀전사들은 부대와 더불어 밀산을 떠나게 되면서 자기들의 사랑스러운 8명의 어린 아이를 양강구의 루경명(娄景明)과 당지 군중들에게 부양을 부탁하였다. 이를 본 군중들은 깊이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들은 정말 녀영웅호걸들이요!” 1936년 2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고 황옥청이 군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안순복은 4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부대를 따라 벌리(勃利), 부금(富锦)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6월과 7월 사이에 부금과 보청(宝清) 일대에 새로운 항일유격구가 개척되면서 보청현 리금위자(李金围子) 서남의 대엽자골(大叶子沟)에 4군의 밀영이 들어섰다. 4군 재봉대는 군부를 따라 대엽자골 밀영에 자리잡았다. 그 시절 4군 재봉대는 20여명 녀전사로 구성되였는데 밀산현 서대림자와 양강구를 거친 안순복, 허현숙, 리동숙, 리범숙 등 모두가 대엽자골 밀영에서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1936년 겨울에 항일련군 제4군 군부와 4군 장병들은 대엽자골 밀영에서 동기강습을 받았다. 재봉대원들도 동기강습의 한 부분이였다. 그들은 군사와 문화 등 지식을 보다 익히면서 ‘민족해방전쟁과 통일전선’, ‘무산계급혁명’ 등 문제를 가지고 학습하며 토론을 벌리였다. 그해 겨울의 강습을 거치면서 4군 재봉대는 물론 부대장병들의 정치와 군사, 문화 수준은 새로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7년 1월에 이르러 4군은 원래의 700명으로부터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과에는 황옥청은 물론 부대의 후방공급의 일익을 맡아나선 4군 재봉대 녀전사들의 숨은 노력도 크게 깃들어있었다. 허현숙의 남편 황옥청은 1936년 그해 제4군의 제1퇀을 거느리고 밀산, 벌리 등지에서 맹활동을 벌리였다. 1937년 음력설(2월 11일)을 앞둔 2월 초경에 황옥청은 소속 1퇀 3련의 30여명 기병대를 인솔하여 벌리로부터 보청의 대엽자골 4군 밀영에 들어섰다. 황옥청과 4군 녀전사인 안해 허현숙과의 만남이기도 하였다.
2 4군 밀영에 들어선 황옥청은 군장 리연평(李延平)에게 그간 군사활동을 회보하는 한편 설맞이 전리품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 군부와 밀영의 재봉대는 한결 생기를 띠였다. 군장 리연평과 황옥청은 보청과 부금간의 4군 교통선을 어떻게 다시 열 것인가를 토의하면서 황옥청이 내놓은, 지방의 방가대원(方家大院) 지주무장을 소멸할 방안을 짜고들었다. 방가라는 이 지주놈은 우리 항일련군의 활동을 백방으로 저애하면서 4군의 몇몇 동지들을 해친 일까지 있었다. 1937년 섣달그믐날인 2월 10일, 황옥청은 ‘일본토벌대’로 가장한 1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자태름름하게 방가대원에 들어섰고 총 한방 쏘지 않고 지주무장을 해제하여 버리였다. 많은 식량 등도 해결하여 4군 밀영은 그해 음력설을 즐거운 기분 속에서 쇠게 되였다. 잇달아 방가대원은 4군 부대가 부금에서 보청으로 가는 련락장소로 되였다. 1937년말에 이르러 일본침략자들은 일위군 5만여명의 병력을 긁어모아가지고 우쑤리강, 송화강, 흑룡강 하류의 삼강(三江)지구에 대해 전대미문의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소속 제4군과 제5군, 제7군, 제8군, 제10군 부대들은 반토벌전에 총궐기하여 일정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병력 등 여러 면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현실의 불리한 국면에서 벗어나며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과의 련계를 가지기 위하여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1938년 4월에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가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족 황옥청(黄玉清)은 제4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이였다. 그는 4군과 5군의 동지들과 함께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西征)을 다그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서정부대는 도합 68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제4군 군장 리연평(李延平)과 부군장 왕광우(王光宇)의 지휘하에서 목단강 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이나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높이였다. 삼도통전투 이후 아군의 서정부대는 적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면서 사도하자(四道河子)와 삼도하자(三道河子)를 지나고 로야령(老爷岭)을 넘으면서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300리 심산밀림을 헤치고 나갔다. 그 속에는 4군 재봉대 소속 녀전사들과 5군 부녀퇀의 녀전사들이 섞이였다.
3 7월 8일에 서정부대는 위하현(苇河县, 즉 珠河县, 후에 尚志县, 尚志市로 개칭) 경내에 들어서면서 단기적인 휴식정돈 시간을 가지였다. 12일 이른새벽에는 적들이 낌새를 챌 사이도 없이 위하현 동북쪽 루산진공격전투를 벌리여 일위군 14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경기관총 2정과 보총 100여자루, 탄알 1만여발 그리고 적잖은 식량 등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적들의 교량과 통신설비를 짓부시기도 하였다. 4군과 5군의 조선족녀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루산진진공전투에서 아군은 빛나는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들어 제4군과 제5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제4군의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이때의 부녀퇀은 4군과 5군의 녀전사들을 합치여 2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안순복과 허현숙, 리봉선 등의 첫 만남이고 어울림이였다. 허현숙의 남편인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도 4군의 일부 장병들과 더불어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런데 허현숙 관련 자료는 허현숙이 5군 1사 속에서 활동하고 황옥청이 다른 갈래 아군부대에서 행동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헤여져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2015년 8월)으로 된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에 올린 허현숙 전기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는 실수를 빚어냈다.
석별의 시각, 황옥청은 안해 허현숙의 두 손을 뜨거이 잡아주었다. “나는 당신을 돌볼 수 없게 되였소. 매사에서 무척 조심하길 바라오. 우린 꼭 승리할 것이요.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 것이요.” 그러는 남편을 두고 허현숙은 금방 한뜸한뜸 만들어낸 헝겊신 한컬레를 남편에게 맡기면서 평온스레 말하였다. “시름 놓으세요. 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거예요. 당신도 항상 조심하세요.” 허현숙은 서정길에서 이렇게 남편 황옥청과 헤여졌다. 그들은 이 리별이 영원한 리별로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지금 보면 이는 분명 실수로서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한 황옥청을 잘 모르고 빚어낸 오유적 기록이였다. 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허현숙, 안순복 등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와 함께 오상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오상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1938년 7월 25일의 전투도 그러하였다. 이날 허현숙 소속 서정부대는 길동성위 서기이고 5군 정치부 주임인 송일부(宋一夫)와 4군 군장 리연평, 4군 부군장 왕광우 등의 지휘하에서 오상현 원보진(元宝镇) 부근의 집단부락 진공 전투를 벌리여 일부 식량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곳 집단부락 진공 전투는 상상외의 치렬한 전투여서 40여명의 장병들이 희생되는 피눈물의 결과를 가져왔다.
4 7월 29일, 서정부대는 일면파 남사진(一面坡南沙镇)을 야습(夜袭)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주야행군중 적들과의 조우전을 치르기도 하면서 탄약이 따르지 못하고 사상자가 늘어갔다. 극히 어려운 투쟁환경 속에서 서 정부대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도망현상도 없지 않았다. 더우기 서정부대의 주요 책임자인 송일부(宋一夫)도 공금을 가지고 달아나 그 영향이 아주 나빴지만 부대내의 녀전사들은 어느 하나도 부대를 떨어지지 않았다. 8월에 이르러 서정부대가 오상현 충하(冲河, 오늘의 오상시 충하진)지구에 이르렀을 때 4군의 서정부대는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8월 15일에 아군은 충하 부근의 한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부 식량을 얻었지만 적들의 추격을 받았다. 치렬한 전투 가운데서 4군 1사 2퇀 퇀장 마국신(马国臣) 등 64명이 불행히 포로가 되고 부대는 엉망이 되였다. 4군의 1사 사장 곡성산(曲成山)은 적들에게 붙잡혀 변절하고 말았다. 이날 전투에서 허현숙도 한창 적들과 싸우고 있을 때 한 녀전사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허현숙은 결사적으로 그 녀전사를 구출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여 오상현 일본수비대감옥에 끌려갔다. 오늘의 충하진은 오상현소재지에서 동남으로 72킬로메터 떨어진 곳이다. 일본수비대 감옥에서 적들은 허현숙에게 부대의 행동부서를 대라고 미쳐 날뛰였다. 허현숙은 적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갖은 악형으로도 항일련군의 이 녀전사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나중에 악착하기 그지 없는 적들은 허현숙을 끌어내다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허현숙은 자기의 희생으로 한 공산당원, 한 항일련군 녀전사의 숭고한 맹세를 실천하였다. 황옥청은 안해의 희생으로 인한 모진 슬픔을 이겨냈다. 부대의 거듭되는 손실도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하였다. 1938년 10월, 황옥청은 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5군 1사와 함께 림구 조령(刁翎)일대에 돌아와 5군의 후방기지를 찾았다. 후에 그는 중공길동성위 위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정치부 주임 중책을 짊어지고 적들과 싸우다가 1940년 2월 20일에 보청현 태평구의 석회가마(石灰窑)가 있는 곳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허현숙과 황옥청의 작은 아들 황동순(黄东淳)은 아버지 소속부대인 항일련군 제4군에서 꼬마교통원으로 활약하다가 1939년 겨울 밀산현 합달하(合达河)에서 왜놈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우소웅(于绍雄) 주필로, 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동북항일련군장령전》(2009년 10월 출판) 황옥청 전기에서는 허현숙과 그의 작은 아들이 오상현 충하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였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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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익장의 정열… 무용예술이 주는 삶의 보람
안무 스케치를 하고 있는 최옥주. 7일, 전 주 민족문화 전승 발전 ‘평생영예칭호’를 받은 국가 1급 안무가 최옥주(85세) 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자택을 찾았다. 작업실 겸 응접실로 쓰고 있는 방 한켠에 놓인 테블 우에는 그녀가 직접 그렸다는 안무 스케치 용지들이 두텁게 쌓여있었다. 잠간 정신이 팔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보고 있는 사이 최옥주 안무가는 커피잔을 들고 다가오면서 “요즘 무용화책의 출판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근황을 밝혔다. 중국조선족 무용의 력사를 집약적으로 반영하는 화책의 이름은 《무혼》으로 잠정, 책에 수록된 안무 스케치들은 전부 그녀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예전부터 작품을 구상할 때면 전반적인 안무효과를 직접 보기 위해 종이에 머리 속에 있는 춤의 동작들을 스케치했다. 이것이 습관이 되여 이젠 내 창작의 일부가 되였다.” 안무 뿐만 아니라 무대 우의 모든 소도구, 배경화면, 무용수들의 복장 디자인까지 모두 그녀의 필끝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치 종이 우에서 한편의 아름다운 무용서사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하다. 무용수로서의 최옥주의 예술인생은 시작이 그닥 순조롭지 않았다. 그녀가 도문시 제2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연변가무단에서 학교로 배우모집을 왔으며 무용기초라고는 전혀 없는 15살 소녀는 기적처럼 연변가무단에 발탁됐지만 기적은 결코 그녀에게 기쁨만을 선물해주지 않았다. 미운 새끼오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은 피땀을 흘려야 했으며 그러한 끈기와 노력 덕분에 입단하여 5년이 지나서부터는 연변가무단의 골간 무용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최옥주는 1964년부터 무용창작을 시작했으며 한편, 47세까지 골간 무용수로 활약했다. 그녀는 “무용은 단순한 표현예술이 아니다. 인간을 묘사하고 자연을 노래하며 그 속에 있는 예술가의 리념을 가송해야 한다. 그리고 무용작품에는 시적인 정취와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창작리념을 잘 반영하듯 그녀는 줄곧 자신의 작품에 “자연과 인간의 화합과 공존, 하모니”를 표현하려 했다. 최옥주의 이러한 창작리념과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바로 무용 와 이다. 이 또한 그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형무극 의 한 장면   그녀의 대표작은 단연 대형무극 을 꼽는다. 1990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중국조선족의 무극의 공백을 메워준 작품이다. 그 창작배경에 대해 최옥주는 아래와 같이 털어놓았다. “개혁개방 이후 외국의 여러 우수한 문화예술들을 접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그 가운데서 나는 많은 계발을 얻었는데 그동안 우리의 예술창작은 영원한 주제를 떠나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사랑’이다. 이성사이의 사랑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인간세상은 워낙 사랑에 울고 웃는다. 그전 시기까지 우리의 무용예술은 중국조선족특색에 맞는 자체발전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인위적이고 도식화된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역적 특색을 살리면서도 민족의 전통무용에 뿌리를 둔 우리만의 민간무용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다.” 최옥주는 안무로부터 시작해 각본, 무대조명, 무대미술, 무용수의 복장 디자인, 소도구의 제작에까지 모두 직접 참여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형무극 이 완성되였고 1990년 북경에서 있은 아세아경기대회 예술축제 페막식 공연에 참가해 1등상을 수상했으며 “민족무극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전보류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은 우리 나라 예술계 최고상인 제1회 ‘문화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한국 남원에서 있는 제64회 ‘춘향제’에 참가해 극찬을 받았고 최옥주 역시 남원축제위원회로부터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젊은 시절, 무용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쳤던 최옥주 안무가,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며 그녀는 “아직도 연변의 무용예술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 문화적인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 사회를 관조하고 형상화시키면 얼마든지 개성적인 작품이 등장할 수 있다고 본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글·사진 박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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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뒤에 숨은 슬픈 이야기들
약 2억딸라의 예산으로 13억딸라가량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 《블랙팬서》.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액션 신과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들, 가상의 왕국 '와칸다'의 매력과 지루하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스토리 전개까지. 이 모든 것이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고 갓 10돐을 맞은 마블 스튜디오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예술성과 영화로서의 성공을 떠나서 《블랙팬서》의 몇몇 대사 속에 어떤 의미가 함축되여있고 어떤 아픔이 숨어있는 지를 알아보련다.
◆영화 《블랙 팬서》의 의미 우선 영화 제목부터 살펴보자. '흑표범'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은 사실 1966년에 창시된 미국의 동명의 흑인인권당에서 유래했다. '흑표당'이라고 의역되는 이 정당은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 그중에서도 경찰이 람용하는 폭력에 맞서고자 만들어졌다. 이들은 흑인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사회적 평등을 위해 싸웠다. 《블랙팬서》는 단순히 슈퍼히어로의 이름과 모티브가 아니다. 백인 중심 사회의 인종차별과 무시를 공격적으로 혹은 조용히 맞서온 흑인들 하나하나의 자부심과 긍지를 상징하고 이들의 고통과 핍박 속에서 피여난 정체성을 나타낸다.
◆국민의 소중함과 세계의 절실함 와칸다의 국왕 티찰라와 미국에서 용병으로 살아온 그의 사촌 에릭 킬몽거. 이 두 사람의 주요 갈등은 와칸다의 페쇄적 정치에 대한 킬몽거의 불만에서 비롯한다. 이전에는 유럽의 식민지로서 형제들을 빼앗기고 학대당하는 고통을 겪었고 요즘은 내전, 가뭄과 자원 부족 등 여러 어려움에 짓눌려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형제들을 와칸다는 외면한다.킬몽거는 이에 와칸다를 향한 반감을 가지고 티찰라를 왕좌에서 밀어낸다. 후에 티찰라는 킬몽거와 싸워 권력을 되찾지만, 이제는 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왕좌에 앉는다.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티찰라는 자신과 국가의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까지 지켜온 보수적인 태도를 바꾼다. "와칸다는 더 이상 그림자 속에 숨어 지켜보고만은 있지 않을 겁니다.우리는 지구 곳곳의 형제자매들에게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하여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부족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유외에 죽음을 택한 자들 후반부의 오랜 싸움 끝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킬몽거.티찰라는 아직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킬몽거는 자신의 불 같은 정신은 와칸다에 맞지 않음을 알고 거절한다. 이는 1803년 이그보 사건을 념두에 둔 말이다. 이그보 지역에서 팔려온 흑인들중 약 75명이 미국으로 항해중 선상 반란을 일으켜 노예상들로부터 배를 빼앗고 자신들을 매매한 그들을 가라앉히고 본인들도 집단 자살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미국 땅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갈 수도 없었던 이들은 손발에 사슬을 달고 조용히 물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블랙팬서》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작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선 흑인들의 문화와 력사를 리해하면 제작자가 전하고자 하는, 화려한 액션 뒤에 자리한 영화의 의미를 마주할 수 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깎아내리려는 것을 거부한 19세기의 노예들, 불공평한 사회 속에서 평등과 개선을 웨치던 인권운동가들 그리고 서글픈 력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현대의 사람들. 이 모두의 의견과 열정을 나타내고 화합을 제시하는 영화가 바로 《블랙팬서》이다.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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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주공주》 20돐 기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드라마 《환주공주》가 올해로 20돐을 맞이했다. 《환주공주》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청나라 건륭제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8년 4월부터 방송된 《황제의 딸》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작품을 통해 주연을 맡았던 조미와 림심여, 소유붕, 범빙빙 등 배우들은 큰 인기를 얻게 됐다. 이들은 20년이 지난 지금 모두 톱배우로 성장해 연예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로 20돐을 맞이한 《환주공주》는 국내에서 여전히 추억 속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주연배우들은 최근 시나연예를 통해 《환주공주》가 자신에게 어떤 작품이였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잊지 못할 특별한 작품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제비 역의 조미는 “드라마 한편을 통해 시청자들의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모두와 공통의 추억이 있는 것”이라며 “아직 딸이 《환주공주》를 보지 못했는데 딸이 《환주공주》를 본 후 저에 대한 약간의 존경심이 생기길 바란다.”는 소감을 전했다. 자미 역의 림심여는 “자미를 연기한 이후 자미와 비슷한 캐릭터들을 제안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였지만 나중에는 괜찮아졌다. 비슷한 느낌이지만 똑같이 표현할 필요가 없고 이야기가 다르고 인물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다른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환주공주》를 통해 얻게 된 아름다운 우정이 정말 소중하다. 20년 동안 우정을 이어오면서 함께 경쟁하고 성공하며 함께 성장하는 이런 우정을 얻기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금쇄를 연기한 범빙빙은 “《환주공주》 촬영 당시 저는 16세였다. 그때는 이 직업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상태였다. 이전에는 연기를 단지 재미있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환주공주》를 찍고 난 이후 연기는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고 밝혔다. 이어 “《환주공주》는 모두에게 한 시대의 특별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를 통해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모두에게 잊지 못할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작품이기 때문에 《환주공주》는 하나의 고전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종합
문화/공연
사색에 젖은 삶의 교차로에서
점차 날이 저물고 어둠이 대지에 드리운다. 2017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 2018년을 맞이하는 밤이 찾아온다. 올 한해도 참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행복했던 일, 슬펐던 일, 화났던 일이 많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노라니 가슴에 있는 모든 안 좋던 일들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창문 너머로 가끔씩 들려오는 폭죽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탄다. 커피의 향긋한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한다.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져 한잔에 녹아 스며있는 달콤쌉싸름한 맛은 우리의 삶과 무척 닮은 것만 같다. 이순이 넘는 녀인네가 꿈 많은 소녀인양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인생의 단맛, 쓴맛의 향기를 이제야 느끼는듯 커피잔을 기울이며 어둠이 깃든 창밖을 바라본다. 연길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공원은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왔는가 싶게 황홀한 빛들로 반짝이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와! 무슨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 북적북적 붐비고 있는 것이지?”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호기심에 문을 나섰다. 초겨울에 내린 눈은 이미 다 녹아버렸지만 인공 눈으로 공원은 한겨울의 정취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동지달이지만 날씨는 포근하다. ‘제5회 연길국제빙설관광축제’ 개막식과 더불어 반짝이는 화려한 불꽃놀이로 2017년의 마지막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신나는 북춤, 부채춤, 가야금 병창, 농악무, 노래들로 2016년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였었는데 올해는 무대 앞에서 광장무를 신나게 추는 사람들로 2017년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구경하던 아낙네들, 아저씨들이 흥에 넘쳐 덩실덩실 춤을 춘다. 2017년 마지막 축제의 밤은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 사람들의 얼굴에도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열심히 달려온 한해를 보내며 나이테 하나가 더 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이 이 밤도 아쉽지만 그만큼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오는 인파 속에서 나는 작은 물방울이 되여 그들과 함께 흐르며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동란의 세월에 내 젊은 날을 바치며 마음껏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늘 품고 있었다. 한때는 그렇게도 지독하게 달라붙던 생활고도 벗어난지라 이제라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문학아카데미에 발을 들여놓았다. 열심히 배워도 선생님의 강의는 알쏭달쏭하지만 문학의 신비는 내게 배우는 즐거움은 선물했다. 이순(耳顺)의 가지를 친 나이에 막을 수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배움의 감동으로 벅찬 한해였다. 열심히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었는지 나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지만 나의 수필이 상을 받는 기쁨도 만끽하였다. 게다가 삼십여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서 처음으로 꽃다발도 받아보았다. 내 수상의 기쁨을 나보다도 더 기뻐해준 남편이였다. 내 생에 이보다 더 기쁜 날이 있었던가? 그 기쁨은 나에게 글을 쓸 용기를 더해주었으며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였다. 상을 받고 감격했던 그날을 생각하니 반짝이는 불빛도 귀여운 눈 조각상들도 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만 같아 다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생각에 걷노라니 눈 조각상들이 저마다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며칠 전부터 공원에서는 땅밑에서 분수가 터졌나 싶게 백설이 솟구치며 뿜어져나왔다. 그 백설은 조각가들이 섬세한 손끝을 애무하고 흘러나오는 순간 마치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눈사다리를 타고 하늘나라의 무료함을 달래려 속세의 희로애락을 부러워 선녀들이 내려왔는가 싶다. 아련한 손길로 가야금을 타는 녀인, 날씬한 몸매로 물동이춤을 추는 녀인… 별무리를 안고 내려와 우리들을 반겨 맞아주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명랑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도 보인다. 어릴 때는 한살 더 먹으면 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하며 새해를 기다렸고 이십대 적에는 한살 더 먹으면 빨리 시집갈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하며 달콤함에 빠져있었다. 결혼 후에는 해와 달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오다보니 어느새 이순에 가지를 친다. 그래도 열심히 달려온 보람으로 오늘을 여유있게 즐기고 있지 않는가. 한쌍의 커플이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왔다. 반짝이는 하트 앞에서 온갖 닭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그들을 보며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랑표현을 할 수 있는지 오히려 내가 민망해 날 정도이다. 나는 두 련인을 다정한 모습을 렌즈 속에 담으며 그들의 사랑이 영원히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나는 인파를 따라 여기저기 거닐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보기도 하고 눈앞의 황홀한 정경에 빠져보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은 때론 고독하고 외로운 것 같지만 그 시간들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며 나만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덕분에 래일을 향한 발걸음이 가볍다. 희망찬 새해를 선물처럼 더욱 소중하게 받아들여야겠다. 정결한 마음으로 선물의 포장지를 풀면 아마 안에는 365개의 령롱한 구슬이 담겨있을가? 흠도 티도 없는 365장의 옥판선지(玉板宣纸)가 담겨있을가? 구슬이라면 하나하나 예쁘게 꿰여 보배로 만들어야겠다. 옥판선지라면 사랑, 용서, 기쁨, 감사로 한점한점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워가야겠다.  
문화/공연
내가 왕모로소이다
나의 아들은 이름이 주몽이다. 옛 시조왕 고주몽의 존명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니 지인들과 앉은자리에서 나는 가끔 ‘왕모’로 불리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럽던 그런 부름이 자주 반복되니 거부감도 사라졌다. 이젠 아들도 열살이니 ‘왕모’라는 이름을 가진 지도 십년째라 습관도 될 법한 중견인 셈이다. 굳이 이 부름에 누가 질의를 던진다면 내가 준비해놓은 비장의 카드 하나가 있다. 바로 우리 청송 심씨 가문의 비사이다. 심씨는 조선시대의 량반 대가로 력대로 왕비 세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그중 한명이 바로 훈민정음의 창시자-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왕후이다. 바꿔 말하면 후세에 칭송이 자자한 세종대왕이 심씨네 사위였다는 사실, 가문의 그런 계보에 따라 나의 몸에서도 억지로나마 왕비의 피가 흐른다고 고집할 만하지 않는가. 왕비가 누구인가? 바로 한 나라의 어미이다. 전혀 매치가 안되는 천여년 전의 왕과 몇백년 전의 왕후가 이렇게 시공간을 뛰여넘어 나에게서 어우러 부활했으니 이것 역시 한사람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대목이리라. 또 나는 가끔 '류화부인’이라고도 불리운다. 다름 아니라 신화 속 고주몽의 어머니가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딸 류화라는데서 붙여진 별칭이다. 이런 별명들은, 아들 이름 하나 잘 지어 어마한 별명 여러개를 농사한 나의 사례라 하겠다. 허나 이렇게 허세를 부려보지만 따져보면 선조 고주몽은 아버지가 하늘신인 해모수이기까지 하니, 기껏 사업하는 아빠에 글쟁이 엄마를 둔 나의 아들에 비해 스펙이 완벽한 엄친아이다. 씁쓸한 이런 현실 때문에 남들의 입에 ‘왕모’든 ‘류화부인’으로든 등극되면 ‘그저 웃지요’ 하는 식으로 일소에 붙일 뿐이다. 화려하지만 별명은 어디까지나 별명이고, 옛날 대여섯 자식에 기나긴 몇십년을 고생하신 부모 세대에 비하면 아직 나의 부모 편력은 겨우 십년이다. 하지만 이 강산 한겹이 때벗이하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변화로 이어진 나날이였던가. 아들이 태여나고 우선, 결혼 뒤에도 오래동안 해왔던 두 사람만의 생활리듬은 완벽하게 깨졌다. 종래로 자연의 주기가 아닌 나의 의지 대로 자고 깨여나기를 구르는 돌처럼 자유롭던 나는 꼬박꼬박 그 시간이면 자야 되고 그 시간이면 기상해야 했던 것이 정말로 큰 곤혹이였다. 서너시간을 간격으로 에누리없이 배고파하고 그토록 정확히 저녁때만 되면 때기름이 반지르르해지는 아기 몸 때문에 나는 수유 한번 거스르거나 목욕 한번 농땡이 칠 수 없어서 초침마냥 시간에 실려 때깍때깍 돌아갔다. 더우기 사랑하던 술과도 6년 동안 철저히 결별해야 했다. 그동안 살면서 쌓아놓은 ‘애주가’ 타이틀이 허무하게 날려간 시간들이였다. ‘자식중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들이 생긴 뒤 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몸은 임산에 의해 풍뎅이 라인으로 거듭났고. 중요한 것은 내가 부딪치기 싫고 어려워하던 많은 일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것이였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크면서 한 성격 하는 주몽이와의 마찰이였다. 배 속에 있을 때에는 이 엄마를 입덧 한번 시키지 않을 정도로 효도스러웠고 모유수유를 하던 내내 순둥이였던 애가 두돌이 지나면서부터 매사에 어미를 거스르기를 제멋대로였다. 배꼽인사 한번 가르치려니 절개 지키듯 허리 꺾기를 죽도록 거부했고 약 한입 먹이려니 두세시간 설복을 해도 막무가내, 힘으로 하려니 자기가 먼저 기절해버리군 했다. 애견, 애묘가인 내가 여직껏 살면서 키워본 것은 동물 뿐이고 그것도 능사껏 순리 대로 키웠지만 내 몸을 빌어 만들어놓은 고집 너무 뚜렷한 이 어린 령물은 도무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생소한 반란에 나는 늘 어쩔 줄을 몰랐다. 생각 끝에 아들 생후 8개월부터 접한 자녀교육 공부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주역에 능하다는 강사를 만나 아들의 장래에 대해 자문한 적이 있었다. 아들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물어서는 뭔가 손을 꼽던 그 분은 “타고 나기로 애가 이름처럼 기가 세군.”라고 말했다. 꿈쩍 놀란 나는 얼른 동을 달았다. “그러면 선생님, 이름이라도 유순한 것으로 달리 지어 애의 성정을 바꿔볼가요?” 간절히 자문했더니 그 분은 “이런 자식을 굳이 낳으려고 해도 쉽지 않겠는데, 기왕 이런 기를 갖고 태여났으니 잘 다스려서 한 인물 만들어야지. 세상 뜻을 거스르겠느냐.”라고 하며 두루 그런 의미들을 하늘의 말씀처럼 전해주었다. 아, 뜻이 이럴진대, 그러면 점점 늙고 힘들어갈 이 ‘류화부인’의 고충은 어느 어버이신한테 기탁하리오? 왕모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인가요? 그렇게 하늘 우러러 그것이 시작인 줄도 모르고 나는 끝을 바라기도 하였다. 별수없이 철 없던 주몽왕자를 길들이던 류화부인을 떠올리며 나는 교육지침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필경 내가 궁 속의 류화부인보다는 인터넷도 잘하고 발도 더 넓지 않겠는가. 그 뒤로 집에는 조선말, 중국말, 한국말로 된 책들이 엎치여 덮치여 쌓여지기 시작했고 목마른 사람 우물 두껑 제끼듯 여기저기 특강에 도장 찍으며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한번 어렵사리 얻은 기회로 유명 교수의 강의에 푹 빠졌던 나는 갑자기 만감이 교차하다가 눈물, 코물까지 흘리며 회의장에서 펑펑 울었다. 아, 엄마가 되더니 나도 드디여 그토록 싫어하던 아줌마의 ‘감성 과다증’에 걸렸구나라는 한탄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대어’라는 아들을 다스릴 ‘사람 낚시법’을 찾아 나는 그렇게 동분서주했다. 그러는 와중에 불어난 골치거리 또 하나. 주몽이의 이유식을 시작으로 부딪친 료리문제였다. 하루 삼시세끼 꼬박꼬박 아이를 위해 알뜰한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은 솔직히 된장찌개와 김치 같은 토종 음식을 만드는 것외 자신하는 료리란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게 버겁디 버거운 문턱이였다. 진짜 왕모라면 이런 일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짝퉁’이라서 도무지 비껴갈 수가 없었는가. 낳아 젖만 먹이면 엄마로 되는 줄 알았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허나 나는 부닥쳐 그냥 구을러 묻혀가는 심정으로 라인이 울퉁불퉁한 몸매를 가릴 사이도 없이 아들의 식단을 위해 여기저기 헤맸다. 음식의 풍미를 섭렵하여 농산물 재배농가를 찾기도 하고 아침시장에 저녁야시장을 누비며 유기농산물들을 수소문하기도 했으며 또 볕 좋은 발코니에 직접 야채농사도 지어보고 료리책에 따라 다듬고 뜯고 찧어서는 하루 몇십번 주방을 오가며 음식 만들기에 도전했다. 덕분에 아들은 살찌고 나도 더욱 살쪄갔다… 이러한 변화들에 부대끼며 내가 얻은 수확이라 할가, 내 새끼를 낳는 순간부터 터무니없는 신심도 생겼다. 바로 아들만 있으면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넉근히 살아갈 것 같았고 하늘 같던 남편도 그냥 걸리적거리는 밥투정쟁이 같아 가끔 추방을 주고 싶던 호기스러움. 이걸 두고 모성애는 아마 빛나면서도 망동할 수 있는 리유라 하겠다. 녀자는 현모 다음에 량처인데 자식이 없을 때에는 나름 량처였으니 이제는 ‘현모 만세’를 부른 셈인가. 하지만 이처럼 여러 변화를 누비는 녀자가 어찌 나 혼자 뿐일가. 그보다도 내가 엄마로 크는 동안 마주할 수 있었던 가장 넓은 마당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일상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겪는 이 시대의 ‘엄마군’들이였다. 아니, 이 시대의 수많은 ‘왕모’들이였다. 그들은 자기만의 직업과 자기만의 능력을, 자기만의 더욱 대담한 꿈을 지니고 세상을 그라운드로 삼아 생활이라는 뽈을 굴려가고 있었다. 자녀교육장에 가면 그런 엄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료리학원에 가면 그런 엄마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나에게 그들은 천우신조 같은 존재들이였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힘을 얻고 경험을 얻고 서로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들도 나처럼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고 당당하나 사실은 들여다보면 나비 같이 여린 아녀자들임을. 남들 앞에 불패신화처럼 강해지려니 자녀의 성정을 꺾을가 저어되고 약한 모습 보이려니 방종시킬가 유예되는, 이래저래 로심초사로 오늘도 ‘왕모’수업에 ‘열공’하는 여린 감성의 엄마들임을 알았다.  
문화/공연
모두 고전명작만 번역하는가
일반 번역이나 통역에 비해서 문학번역의 보수는 가련할 정도로 적다. 문학번역의 보수는 출판사에서 지불한다. 이는 또 책이 출간된 후 시장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알다싶이 중국의 도서가격은 국제 수준에 비해 낮고 외국문학의 열독문턱은 비교적 높다. 내가 알건대 외국에서도 문학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은 적으며 원고료도 낮은편이라고 한다. 시장의 발전에 따라 문학번역에도 비교적 큰 차이가 생겼다. 그중 뚜렷한 것은 무저작권도서(저작권 만기 혹은 저자가 저작권을 포기한 도서)과 저작권도서이다. 무저작권도서의 리윤은 저작권도서에 비해 껑충 높다. 저작권에 관련된 일체 절차와 비용이 필요하지 않고 기한을 넘긴 체납금이거나 계약해지 등 리스크가 없으며 리윤적 보장이 있다. 서점가에 무더기로 쌓인 세계명작들이 바로 그러한 리유에서이다. 번역도 쉽다. 기존의 버전을 베끼면 된다. 심지어 어떤 역자들은 여러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같은 내용을 출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원인 때문에 고액의 번역료 혹은 판세 사례들은 무저작권도서에서 많이 생긴다. 반대로 저작권도서의 번역은 난이도도 높고 위험요소도 많으며 출판사의 원고료 지불 능력도 제한돼 있다. 일부 당대문학작품의 역자들은 1000자에 100원도 못되는 보수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문학작품 번역시장은 기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중복번역과 첫 번역사이 보수가 형평성을 잃은 현황은 짧은 시간내에 개선되기 어렵다. 시장가치가 역자의 보수문제를 좌우지하는 현황을 개변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나는 아래와 같은 세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 현재 번역류 문학상 및 외국문학출판에 대한 자금지원은 많지 않지만 일정한 인도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시상활동은 응당 현대, 당대 작품 번역에 중점을 두고 진행돼야 될 것이다. 역자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은 첫 번역 혹은 고난도의 번역에서 이룬 성과여야 한다. 둘째, 고등학교 교원, 과학연구기구의 연구인원은 문학번역의 주력군이다. 만약 외국문학연구분야에서 문학번역, 특히 현, 당대 중요작품의 번역을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연구성과에 포함시킨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 뛰여들 것이다. 학술표준에 부합되는, 무게가 있는 문학작품을 번역해낸다는 것은 그 난이도와 의의가 우수한 학술저작 편찬에 못지 않기 때문에 응분의 학술적 긍정을 받아야 한다. 셋째, 현재의 환경하에 매체와 사회 각계 지성인들은 인식을 갖고 옳바른 선전을 해야 한다. 스타작가가 번역한 《길 잃은 새》는 번역의 가치면에서 묵묵히 고생하는 젊은 번역가나 고전문학의 공백을 메우는 로번역가의 로고에 비길 수 없다. 시장의 불균형은 우리의 문학번역출판의 질이 리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반적인 독자, 지어는 출판계 일반 종사자가 세계문단에 대한 인식은 표면적이고 편면적이다. 독자가 서방명작, 특히 19세기 이후의 경전저작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쏘련시기의 표준에 머물러있다. 우리 인상 속의 1류의 작품은 세계 주류문단과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세계문단에로의 접근은 언어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일부 언어종류의 문학작품은 세계시장과 문학비평계에서 렬세에 처해있어서 그 가치가 구현되지 못하고 있고 우리 나라에 소개되는 것은 더더욱 적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번역작품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번역출판시장의 동태도 세계 조류와 점점 접근하고 있다. 국제문학상 및 세계 각국 베스트셀러 순위 정보도 시시각각 받아볼 수 있다. 우리가 외국문학시장에서의 전문화된 운행도 우세를 띠기 시작했고 전문가들이 가치에 대한 판단과 독자 구미도 제고를 가져왔다. 장원하게 봤을 때 중국의 작가, 편집과 독자가 보다 빠르게 진정하게 국제 수준을 대표하는 외국작품과 작가를 만나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세계 주류 문단이 승인하는 문학적 토양을 형성할 수 있고 세계적 안목을 가진 좋은 작가와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으며 보다 많은 세계 문학 평론가가 중국문학과 중국문화를 연구할 수 있다. 외국문학 ‘들여오기’를 해야만 효과적으로 우리 문학 ‘내보내기’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근대에 세계급 작가가 부단히 탄생하는 것도 장기간 대량의 외국문학작품을 들여온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들여오기’는 단순한 저작권구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출판기구, 대리기구와 깊은 합작관계를 맺고 문학대리인제도를 연구, 발전시키며 국제 저작권무역방식에 대해 료해, 학습하고 다양한 문화교류 가운데서 발전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상해역문출판사 편집, 역자임.)  
문화/공연
제71회 칸 영화제 개막
8일, 제71회 칸 국제영화제가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에서 개막됐다.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만큼 전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매년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70여년간 쌓은 명성은 쉽게 꺾일 리 없다. 올해 칸 영화제는 영화제 안팎으로 더 많은 변화를 꾀할 전망이다. 녀성 심사위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한편, 경쟁부문에 중국과 한국, 일본의 영화를 모두 초청하면서 아시아 영화 시장의 중요성을 높이 치하했다. 변두리로 취급됐던 녀성 영화인과 아시아 영화를 무대 중심에 세우면서 빗장을 한껏 풀어헤친 듯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하지만 내부 압박은 강해졌다. 공식 상영에 앞선 언론 시사회를 페지시켰고 레드카펫 우 셀프카메라 촬영도 전면 금지됐다. 또 지난해 칸 영화제의 발목을 잡았던 넷플릭스 작품들은 칸 영화제에서 당분간 볼 수 없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 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는 여전히 ‘꿈의 무대’이다.     71회 칸 영화제는 8일부터 19일까지 11일간 개최된다. 개막작은 스페인 영화 《에브리바디 노우즈》(아쉬가르 파라디 감독), 페막작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테리 길리엄 감독)이다. 7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맡는다. 이례적인 녀성 심사위원장이다. 70회의 행사가 치러지는 동안 녀성이 심사위원장으로 임명된 경우는 단 12차례이다. 심사위원은 중국 배우 장진,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 미국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미국 에바 두버네이 감독, 프랑스 로베르 구에디귀앙 감독, 캐나다 드니 빌뇌브 감독, 로씨야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브룬디 싱어송라이터 카쟈 닌이 선정됐다. 심사위원장을 포함한 녀성 심사위원이 5명, 남성 심사위원이 4명으로 결정됐다. 영화제 전반의 분위기 변화를 예견케 한다. 이들 심사위원이 심사할 경쟁작에는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작품도 포함됐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모두 초청받으면서 아시아 영화의 강세가 새삼 눈에 띈다. 또 거장 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서 신선한 이름의 감독들이 이름을 올리며 진출작으로도 칸의 세대교체와 분위기 쇄신을 엿보이게 한다. 71회 칸 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는 레드카펫 셀카 금지와 언론시사회 페지 그리고 넷플릭스 거부이다. 셀카 금지는 레드카펫 행사 진행이 느려지고 격조없이 우습강스러운 분위기만 연출된다는 리유에서 여러번 언급됐던 조항이다. 명확한 단속 방법이 없어 차일피일 미뤄졌지만 올해는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이 공식 립장까지 표명했다. 공식상영 전 진행된 프레스상영도 71회부터 사라진다. 칸 영화제를 찾는 전세계 취재진 및 평론가는 칸 영화제 사무국측 추산 약 4000명이다. 극장 객석에 한계가 있는 만큼 취재 편의를 위한 프레스상영이 공식 수순처럼 열렸지만 칸 영화제측은 단호한 페지를 선언했다. 리유 역시 엠바고가 걸린다. 기자들과의 기싸움은 시작됐다. 칸 영화제와 넷플릭스는 영화제 초청 및 상영을 두고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 극장법에 따른 극장 사업자들의 반발로 칸 영화제측은 “프랑스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만 경쟁부문에 출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결국 넷플릭스는 올해 칸 영화제에 자사 작품을 출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종합
문화/공연
로익장의 정열… 무용예술이 주는 삶의 희망
안무 스케치를 하고 있는 최옥주. 7일, 전 주 민족문화 전승 발전 ‘평생영예칭호’를 받은 국가 1급 안무가 최옥주(85세) 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자택을 찾았다. 작업실 겸 응접실로 쓰고 있는 방 한켠에 놓인 테블 우에는 그녀가 직접 그렸다는 안무 스케치 용지들이 두텁게 쌓여있었다. 잠간 정신이 팔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보고 있는 사이 최옥주 안무가는 커피잔을 들고 다가오면서 “요즘 무용화책의 출판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근황을 밝혔다. 중국조선족 무용의 력사를 집약적으로 반영하는 화책의 이름은 《무혼》으로 잠정, 책에 수록된 안무 스케치들은 전부 그녀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예전부터 작품을 구상할 때면 전반적인 안무효과를 직접 보기 위해 종이에 머리 속에 있는 춤의 동작들을 스케치했다. 이것이 습관이 되여 이젠 내 창작의 일부가 되였다.” 안무 뿐만 아니라 무대 우의 모든 소도구, 배경화면, 무용수들의 복장 디자인까지 모두 그녀의 필끝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치 종이 우에서 한편의 아름다운 무용서사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하다. 무용수로서의 최옥주의 예술인생은 시작이 그닥 순조롭지 않았다. 그녀가 도문시 제2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연변가무단에서 학교로 배우모집을 왔으며 무용기초라고는 전혀 없는 15살 소녀는 기적처럼 연변가무단에 발탁됐지만 기적은 결코 그녀에게 기쁨만을 선물해주지 않았다. 미운 새끼오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은 피땀을 흘려야 했으며 그러한 끈기와 노력 덕분에 입단하여 5년이 지나서부터는 연변가무단의 골간 무용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최옥주는 1964년부터 무용창작을 시작했으며 한편, 47세까지 골간 무용수로 활약했다. 그녀는 “무용은 단순한 표현예술이 아니다. 인간을 묘사하고 자연을 노래하며 그 속에 있는 예술가의 리념을 가송해야 한다. 그리고 무용작품에는 시적인 정취와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창작리념을 잘 반영하듯 그녀는 줄곧 자신의 작품에 “자연과 인간의 화합과 공존, 하모니”를 표현하려 했다. 최옥주의 이러한 창작리념과 예술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바로 무용 와 이다. 이 또한 그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형무극 의 한 장면   그녀의 대표작은 단연 대형무극 을 꼽는다. 1990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중국조선족의 무극의 공백을 메워준 작품이다. 그 창작배경에 대해 최옥주는 아래와 같이 털어놓았다. “개혁개방 이후 외국의 여러 우수한 문화예술들을 접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그 가운데서 나는 많은 계발을 얻었는데 그동안 우리의 예술창작은 영원한 주제를 떠나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사랑’이다. 이성사이의 사랑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인간세상은 워낙 사랑에 울고 웃는다. 그전 시기까지 우리의 무용예술은 중국조선족특색에 맞는 자체발전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인위적이고 도식화된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역적 특색을 살리면서도 민족의 전통무용에 뿌리를 둔 우리만의 민간무용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다.” 최옥주는 안무로부터 시작해 각본, 무대조명, 무대미술, 무용수의 복장 디자인, 소도구의 제작에까지 모두 직접 참여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형무극 이 완성되였고 1990년 북경에서 있은 아세아경기대회 예술축제 페막식 공연에 참가해 1등상을 수상했으며 “민족무극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전보류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은 우리 나라 예술계 최고상인 제1회 ‘문화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한국 남원에서 있는 제64회 ‘춘향제’에 참가해 극찬을 받았고 최옥주 역시 남원축제위원회로부터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젊은 시절, 무용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쳤던 최옥주 안무가,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며 그녀는 “아직도 연변의 무용예술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 문화적인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 사회를 관조하고 형상화시키면 얼마든지 개성적인 작품이 등장할 수 있다고 본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글·사진 박진화 기자  
문화/공연
스타워즈,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
조지 루커스 필름을 손에 넣은 디즈니가드라마 《스타워즈》 시리즈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전세계에서 방영할 계획이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스타워즈 리지스턴스》를 제작, 올가을 디즈니XD 채널에서 방영하기로 했다고 연예매체 버라이어티가 전했다. 미국내에서 방영하고 저작권 계약 이후 전세계로 채널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스타워즈 리지스턴스》는 저항군에 입대한 카즈도 시오노라는 젊은 조종사가 퍼스트오더의 점증하는 위협에 맞서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담았다. 애니메이션이 그려내는 시기는 2015년작 영화 《스타워즈: 깨여난 본능》보다 좀 더 앞선 시기로 그동안 스크린에 옮기지 못한 전인미답의 령역이라고 디즈니는 설명했다. 오스카 아이작, 그런덜린 크리스티, 바비 모이니언, 크리스토퍼 션, 수지 맥그래스, 스콧 로런스, 미나 벨라스코 등이 목소리 연기에 참여한다. 새 시리즈는 루카스 필름의 베테랑 애니메이션 제작자 데이브 필로니가 제작 총괄을 맡는다. 필로니는 “《스타워즈 리지스턴스》의 아이디어는 2차대전 전투기와 조종사들에게서 나왔다. 할아버지가 참전 조종사였는데 삼촌에게서 받은 그에 대한 기억이 령감을 줬다.”고 말했다. 종합
문화/공연
청년작가들 5.4기념 문학좌담회 열어
좌담회에 참가한 청년작가들 4일, 5.4청년절을 맞아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조선족 청년작가들을 조직해 문학좌담회를 열었다. 온, 오프라인에서 활약하고 있는 25명의 조선족 청년작가가 이날 좌담회에 참가했다. 좌담회에서 청년작가들은 조선족문학이 처한 환경과 창작실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으며 창작과정에서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두고 깊이 있는 교류를 가졌다. 한편, 《연변문학》, 《장백산》, 《연변녀성》, 《중국조선족소년보》, 《중학생 작문》 등 문학간행물의 편집들이 좌담회에 참가해 각 간행물의 발간에 대해 소개했으며 청년작가들의 창작을 독려했다. 요즘 온라인 창작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11번가’ 온라인작가동아리 회원들은 “이번 좌담회가 온라인작가들이 조선족 주류문단과 영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인터넷+의 다양성을 살려 중국조선족 온라인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청년작가들이 동참할 것”을 권했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상무부주석은 “현재 우리는 조선문학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력점을 두고 맞춤형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조선족문학의 세대별 작가 대오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년작가 양성과 문학유망주 발굴을 위해 힘쓰겠다.”고 밝혔다. 료해에 따르면 연변작가협회는 조선족문학발전 인재양성을 위해 ‘문학새싹 프로젝트’, ‘문학청년 프로젝트’와 같은 조치들을 내왔으며 제1회 ‘조선족청년작가상’ 등 공모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박진화 기자  
문화/공연
소리를 만나다 (외 2수)
소리를 만나다   눈 뜨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만 감으면 소리로 보인다
하늘에서 구름이 기는 소리
바람이 흔들고 가는 나무잎의 가느다란 한숨이
베란다 빨래줄에 매달린 옷가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소리
고요를 들었다놓는 시계바늘소리 어디론가 잽싸게 내닫는 내 생각의 소리
하나같이 소리에 색갈을 덧칠하며 생동한 화폭으로 펼쳐진다
눈을 감고 소리를 본다, 세상을 조준한다.

흔들리는 오후
바람과 나란히 걷고픈 계절이다
너의 눈빛을 닮은 하늘과 너의 손길을 닮은 여러 나무잎이 투명한 광선아래 삼원(三原)의 연주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이 밝음보다는 어둠이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한 시간이다
지난 어느 순간에 손님처럼 머물며 추웠던 기억도 눈부신 아름다움이였음을 또 다른 나에게서 전해듣는다
흐르는 구름처럼 정처없는 마음이 멋대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바람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스러진다.

함께 가는 길
동행의 길에는 수많은 새길이 있다
나는 새가 아름다워 고개 들어 새를 쫓다가 맑은 물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다가 새길로 접어들기 쉽다
부단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초심을 유지한다면 동행의 길에 새길은 없다
우리 다정한 얘기 멈추지 말자 우리 잡은 손 놓지 말자
어제보다 찬란한 너와 나의 하루가 간다.  
문화/공연
강소백’처럼 젊은층의 감성을 두드려라
센스넘치는 문구가 씌여져 있는 ‘강소백’(江小白) 술이 1년에 3억병은 넘게 팔린다. 이런 문구들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런 문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가? 술을 마시는 구매자들이 직접 만들어낸다. 병에 있는 QR코드를 찍고 술을 마시면서 느끼는 감정을 적어 찍은 사진과 함께 보내면 된다. ‘강소백’의 이 감성마케팅이 통했다.     ◆새로운 트렌드, ‘가성비’ 아닌 ‘가심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 트렌드가 생겨났다. 바로 감성을 자극한다는 ‘가심비’, 가심비란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이라는 뜻으로 일컬어지는 신조어이다. 가심비는 일명 플라시보 소비라고도 하는 데, 플라시보는 비타민제를 주면서 약이라고 했을 때 약효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위약 효과라도고 한다. 스트레스를 소비로 풀면 마음의 안정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국 유명 광고회사 ‘동도’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라온 100억건의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조어 ‘가심비'가 ‘가성비’의 언급량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가심비가 중요한 소비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잡으며 각종 업계에서도 ‘감성소비’, ‘체험소비’ 등 가심비 위주의 소비 형태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선희(31살, 상해)는 어느날 대형마트에서 우유를 사려고 매대 앞에 섰다가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우유를 살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 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서 구매하기까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많은 정보와 부딪쳐야 했다. 그때 ‘사랑이 찾아온 당신, 우유를 마시며 사랑을 하자’라는 문구가 눈에 가장 크게 들어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넘치는 정보 시대에서 어떤 정보가 더 가치있고 필요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감성을 파는 사회에서 사고하며 소비하기
먹고 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숙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면 누구나 두툼한 내복을 입고 지냈고 양치질 하면 불소치약을 제일 먼저 떠올렸던 때이므로 자신의 취향보다 값싸고 튼튼한 제품을 사는 게 최우선이였다. 그 당시엔 기업들이 다양한 제품 종류를 개발하지 않아도 잘 팔리는 시대였다. 1990년대에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그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지금 이 새대를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라고 명명했다. ‘드림 소사이어티’란 기업, 지역사회, 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새로운 사회를 지칭한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으면서 또다른 형태의 새로운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리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머리보다 마음에 호소하는 ‘이야기’ 중심의 감성 시장에서 소비자는 같은 제품이라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든 스토리를 담았을 때 신뢰감과 공감이 더해지면서 날개가 돋치게 되는 것 같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대학생들에게 한 강의에서 한 말이다. 업계마다 ‘감성시대’ 중심에서 ‘가심비’를 앞세운 젊은층 공략에 나섰다. ‘꼭 제품 팔지 않아도 된다’면서 체험형 콘텐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주변을 살펴봐도 백화점 업계나 상가들에서 VR(가상현실), e-스포츠센터와 같은 체험형 콘텐츠를 잇따라 도입하는 리유는 고객들의 체류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러한 체험공간의 필요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에게 어떤 경험을 줄 것인가’가 화두가 됐기 때문이다. 김성욱(28살, 직장인)은 요즘 스초프 게임에 빠져 있다. 축구, 골프, 롱구 등 실제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처럼 실감 나는 설비를 갖춘 게임장에서 친구를 만나고 애인과 데이트도 즐긴다. 게임 후에는 밥도 먹고 쇼핑도 한다. 김씨는 “최근 쇼핑몰, 백화점 등 대형 류통시설 곳곳에 스포츠 게임 체험시설이 늘고 있어 접근성이 좋아졌다”면서 “유명한 시설들을 모두 찾아 다니며 게임 ‘성지순례’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한다. 최근들어 백화점에서 류동인구가 적어 판매률이 저조하던 쇼핑공간을 과감히 없애고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을 시도 하기도 한다. 연길시제4중학교에 부근에 ‘의박후미’e-스포츠쎈터를 개관한 왕동은 “’감성’과 ‘체험’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중시하는 ‘가성비’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 대부분 젊은 소비자들이다.”고 밝혔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산다
‘아직 따끈한 막 구운 빵을 사와서 부엌에 서서 그걸 부엌칼로 자르면서 부스러기를 뜯어 먹는 것, 가을의 오후의 태양빛이 하얀 장지에 나무잎사귀의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이른 저녁 장어집에서 장어를 주문하고 나올때까지의 시간을 혼자서 맥주를 마시면서 읽는 주간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소개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의 리스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알았을가? 자신이 먼저 사용한 단어가 20여년이 지나 젊은 세대들의 트렌드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은 단어의 의미만 생각하면 ‘욜로’와 같은 결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으나 상품, 소비를 넘어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제학자들은 ‘소확행’ 소비방식이 단순히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감성’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최연화(32살, 직장인)는 종종 ‘호캉스’를 즐긴다. 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라는 뜻으로 직장 퇴근 후 호텔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영화를 보고 룸서비스로 끼니를 해결한다. 세들어 사는 원룸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욕조에 입욕제를 담구고 피로를 풀기도 한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선 호텔 조식으로 배를 채우고 간만에 수영도 즐겼다. 휴가를 맘껏 쓰기도 눈치가 보일 때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호캉스만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없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절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휴식공간인 ‘나만의 감성아지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을 감동시키고 위로하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상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개인의 소비는 투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 신념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비하는 지혜, 살아가는 지혜
우리는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걸가? 성공한 누군가의 멋진 모습이 좋아보여 진정한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는 관심도 없이 겉모습만 따라하다가 결국 모조품 같은 인생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비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상품을 왜 사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어떨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소비의 거대 물결에 휩쓸려 원치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연희 기자  
문화/공연
책임의식 지니고 가작 써내야
7일, 주 문학 및 창작 강습반 종강식이 연변대학에서 있었다. 수강생들은 20여일간의 학습을 마치고 수료증을 발급받았다. 종강식에서 중국작가협회 주석단 위원이며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부회장인 엽매는 수료증을 발급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변 조선족문학은 전국 기타 소수민족문학, 중국문학과 융합 발전해왔으며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다년간 연변작가협회는 련락, 협조, 봉사, 지도 등 조직기능을 충분히 발휘해 일련의 의의 있는 활동을 조직, 연변 문학창작 대오를 부단히 발전시켰다. 연변대학과 손잡고 펼친 이번 활동은 조선족문학, 연변문학, 중국 소수민족문학 나아가 중국문학의 발전에 힘있는 한획을 그었다.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새시대에 인민군중의 문학 심미관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수강자들은 책임의식을 지니고 강습의 수확을 동력으로 삼아 가작을 창작해야 한다. 이번 강습에서 수강생은 모어(母语)에 따라 두 조로 나뉘여 연변대학 문학창작, 조한번역 전문가와 학자, 국내 유명 작가, 문학평론가,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수강생들은 고품격의 문학성연을 항수했다면서 이를 동력으로 삼아 새시대에 걸맞는 작품을 꾸준히 창작할 것을 약속했다. 진영혜 기자
문화/공연
연변대학대표팀 ‘5월의 생화’에 출연
‘5.4’ 청년절을 맞이하여 중앙 선전부, 교육부 및 공청단중앙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문예회보공연이 4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중앙TV 종합채널에서 방송, 연변대학 학생들도 이 영광의 무대에 서게 된다.
연변대학은 4일 공식위챗을 통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대표팀의 구성 및 리허설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 문예공연활동은 2001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여 지금까지 17차 조직되였으며 올해의 주제는 ‘새시대의 꿈을 이루자’이다. 연변대학 대표팀은 이번에 무용 ‘3면북’과 ‘마음의 나래’를 준비했고 또 대형민족무 “환락의 춤사위’에도 출연한다. 대표팀은 무용으로 연변대학의 매력과 독특함을 남김없이 과시했고 중앙TV의 각광을 받았다.
연변대학 대표팀은 4명의 인솔자 교원과 34명의 무용수들로 구성되여 4월 25일에 북경에 도착한후 문예야회 리허설에 참가했다. 전국적으로 90여개 대학교의 3000여명 출연자들속에서 연변대학 대표팀은 자체의 매력을 충분히 과시하면서 학교에 영광을 더해주었다.
연변대학 대표팀이 참가한 2018년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문예공연은 4일 저녁 9시부터 CCTV-1에서 펼쳐지고 중앙인민방송국에서도 동시에 방송하며 5일 저녁 7시 30분에 CCTV-3에서 다시 방송한다.
김일복 기자  
문화/공연
지앤지커머스, '과장님 쏩니다 피하세요~' 총격전으로 채운 이색 워크샵
지앤지커머스, '과장님 쏩니다 피하세요~' 총격전으로 채운 이색 워크샵

 '서바이벌 레저스포츠 워크샵'을 주제로 색다른 프로그램 운영

총격전, 딸기 따기 체험 등 팀 별 활동 프로그램으로 조직 역량 강화


'움직이는 광고판' '100만 좋아요를 기록한 이색 채용 공고' 등 톡톡 튀는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은 (주)지앤지커머스가 이번엔 이색 워크샵으로 눈길을 끌었다.

지앤지커머스는 창립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에게 기쁨 주는 친구'라는 슬로건 아래, 고객 만족을 위한 혁신적인 행보를 추구해 온 기업이다. 이러한 지앤지커머스의 비전은 경영 및 사업뿐 아니라 사내 행사에 있어서도 반영돼 왔다.

지난 28일부터 29일까지 1박 2일 동안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서 진행된 이번 지앤지커머스 워크샵 역시 '서바이벌 레저스포츠 워크샵'을 주제로 색다르게 채워졌다.

특히, 이번 워크샵은 기존에 지리산 및 북한산 둘레길을 탐방하던 개인별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팀 별 총격전, 단체 사격전, 딸기 따기 체험 등 팀 별로 화합하고 대항하는 단체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어 구성원들의 뜨거운 참여가 이어졌다.

또한, 야외 활동 이후에는 '캐치마인드', '숟가락 물고 공 이동하기' 등 다채로운 레크레이션 활동을 통해 직원들 간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의 색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알찬 시간을 가졌다.

지앤지커머스의 모영일 대표는 "이번 춘계 워크샵은 기존과 다른 색다른 프로그램을 원했던 직원들의 바람이 반영된 결과"라며, "서바이벌 야외 활동이 추가된 만큼, 직원들이 더욱 즐겁고 역동적인 시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신의와 믿음이 굳건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다'는 신념이 이번 워크샵에서도 반영됐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2002년 설립된 (주)지앤지커머스는 국내 최초 도매 오픈마켓 도매꾹 서비스 개시 이후, 10년 넘게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B2B 오픈마켓 사이트로 인정받아 왔으며, 3년 연속 청년친화 강소기업, 중소기업혁신상 등을 수상한 내실이 탄탄한 강소기업이다.
문화/공연
민족작가 세가지 큰 국면 형성해야
문학과 창작 강좌를 하러 연변대학에 온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비서장이며 작가, 사회활동가인 조안표가 3일 본사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조안표는 만족이며 해방군예술학원 문학학부를 졸업했다. 중국소수민족영화프로젝트지도소조 성원이고 북경시민족종교제재영상작품평의위원회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장편소설 , 산문집 《순수한 물에는 향이 없다》,중편소설집 《북경에서 있었던 일》 등 10여부의 작품을 펴냈다. 주당위 선전부, 연변작가협회,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연변대학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연변문학과 창작 강습반에서 그는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그것은 대구도, 대시야, 대제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훌륭한 민족작가라면 전반적 의식과 넓은 시야로 큰 제재를 다뤄야 한다. 조선족문학사업이 발전, 번영하려면 조선어로 훌륭한 작품을 창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쌍방향 번역 사업이 활성화돼야 한다. 조선족작가라면 조선어로 작품을 창작하는외에도 한어 열독 및 창작 능력을 키워야 하는바 한어를 잘 배우고 잘 활용해야 조선어를 잘 보호하고 발양, 계승할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조선족작가들의 작품이 한어 혹은 기타 민족 언어로 번역되는 것이 드물거나 번역이 정확하지 못한 탓으로 중국 대다수 독자들이 조선족작가의 작품을 접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서 이는 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를 전파하는 데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조안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수민족문학은 종래로 한족문학에 뒤처진 적이 없다. 한어문학과 소수민족문학은 예로부터 융합된 채 성장해왔다. 조선족작가에게는 기타 민족에게 없는 생활체험이 있고 뼈속에는 대대로 전해져내려온 민족의 문화적 요소가 있다. 오직 자기 민족의 언어, 문화, 력사, 정치, 경제에 깊은 료해가 있고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부단히 강화하며 자신을 시대에 융합시키고 예리한 안목으로 시대의 맥박을 짚어내며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부단히 탐구, 발굴해야만 습근평 총서기가 말한 ‘쟁쟁하고 자랑스러우며 가치가 있는 문예정품’을 창작해낼 수 있다.” 조안표는 “조선족문단은 문학신인 발굴과 지지 등 사업에 모를 박고 조선족의 우수하고 유구한 문화를 전승해나가야 한다.”, “조선족문학은 지역적 우세를 잘 활용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연변의 작가와 번역가들이 좋은 작품을 통해 전국과 세계로 나아가기를 기대했다. 이번 연길행에 조안표는 유명 작가, 문학평론가, 편집, 문학교수 등 10명을 조직해 연변대학 사생과 중문연구생 및 연변문학과 창작강습반 성원들을 위해 강좌 및 교류를 진행하게 된다. 리련화 기자
문화/공연
연변대학, 4일 저녁 중앙TV ‘5.4’문예야회에 출연
‘5.4’ 청년절을 맞이하여 중앙 선전부, 교육부 및 공청단중앙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문예회보공연이 4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중앙TV 종합채널에서 방송, 연변대학 학생들도 이 영광의 무대에 서게 된다.
연변대학은 4일 공식위챗을 통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대표팀의 구성 및 리허설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 문예공연활동은 2001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여 지금까지 17차 조직되였으며 올해의 주제는 ‘새시대의 꿈을 이루자’이다. 연변대학 대표팀은 이번에 무용 ‘3면북’과 ‘마음의 나래’를 준비했고 또 대형민족무 “환락의 춤사위’에도 출연한다. 대표팀은 무용으로 연변대학의 매력과 독특함을 남김없이 과시했고 중앙TV의 각광을 받았다.
연변대학 대표팀은 4명의 인솔자 교원과 34명의 무용수들로 구성되여 4월 25일에 북경에 도착한후 문예야회 리허설에 참가했다. 전국적으로 90여개 대학교의 3000여명 출연자들속에서 연변대학 대표팀은 자체의 매력을 충분히 과시하면서 학교에 영광을 더해주었다.
연변대학 대표팀이 참가한 2018년 ‘5월의 생화’ 전국 대, 중 학생문예공연은 4일 저녁 9시부터 CCTV-1에서 펼쳐지고 중앙인민방송국에서도 동시에 방송하며 5일 저녁 7시 30분에 CCTV-3에서 다시 방송한다.
김일복 기자  
문화/공연
‘진달래향기속에 피여난 수필다발’
연변작가협회 산문창작위원회 회원들은 지난 4월 29일, 중국·화룡 제10회 장백산진달래국제문화관광축제가 펼쳐진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에서 현지 답사 활동을 조직했다. 이들은 식물원을 참관하고 민속음식부스에서 찰떡, 김치, 순대, 떡볶이 등 다양한 조선족전통음식도 맛보았으며 축제현장을 찾은 외지관광객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당지 무형문화재를 전시한 지방제품전시부스의 공예품과 대형김치움까지 둘러보고나서 이러한 볼거리들로부터 ‘관광도시, 건강도시, 개방도시’건설템포를 느낄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 진달래축제는 국제화, 민속화, 생태화 및 시장화 특색을 살려 영향력 있는 지역문화관광축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사에 앞서 한달전부터 수필신작 25편을 집모한 산문창작위원회에서는 이어서 김태욱 회원의 농가에서‘두만강문화연구탐방 시리즈(10)’인 간담회를 가졌다. 이들은 , 등 수필들에 대한 촌평을 경청하고나서 현대수필의 밀도있는 탐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20여명 수필가들이 ‘진달래향기속에 피여난 수필다발’이라는 제목으로 수필문단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보다 탐탁한 미래지향을 리드하는 이벤트로 추억을 남겼다. 매상  
문화/공연
꿀벌이라는 이름으로 태여나 (외 2편)
꿀벌이라는 이름으로 태여나   4월의 문을 열고 살구꽃, 앵두꽃이 다투어 피여나자 붕-붕- 하고 한겨울 숨어살던 꿀벌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꿀과 꽃가루를 채집하는 신근한 로동의 노래를 듣노라니 ‘근면은 꿀벌들의 타고난 품성이면서 정신’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내가 시골에 살던 1970년대 말의 어느 여름날, 생산대의 양봉원인 이모부를 보러 양봉장으로 갔을 때 한창 꿀을 뜨던 이모부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이모부의 양봉장에서 이슬비가 잔잔히 내리는 날에도 쉬지 않고 일하러 나가는 꿀벌을 보았고 먼곳으로 갔다가 날이 어두워 당날로 돌아올 수 없으면 꽃잎에서 쪽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돌아오는 꿀벌도 보았다. 종래로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떠민 적이 없이 일심전력으로 채밀에 목숨을 걸고 꿀 1킬로그람을 모으기 위해 560만개의 꽃을 찾아가야 한다는 꿀벌에게는 하루 24시간이 너무 짧다고 한다. 자나깨나 꿀생각이요, 눈만 뜨면 꿀을 찾아가야 하는 꿀벌의 삶을 두고 오죽하면 슬퍼도 슬퍼할 시간이 없다고 했을가! 꿀벌이라는 이름으로 태여나 꿀과 화분을 모으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죽는 날까지 필사적으로 일하는 저 작은 곤충 앞에서 지금 나는 나의 게으른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할미꽃천사
나는 봄에 피는 꽃을 통털어 하늘이 이 땅에 내려보낸 봄날의 천사라고 합니다. 봄은 바로 이런 천사들이 있음으로 하여 향기롭고 아름답게 장식되니까요. 진달래꽃, 민들레꽃, 개나리꽃, 살구꽃, 앵두꽃… 산에 들에 피여나는 많고많은 꽃 속에 할미꽃이라고 부르는 머리가 하얀 천사도 있습니다. 타고난 은발머리 때문에 일명 백두옹이라고 부르는 할미꽃! 할미꽃은 산기슭 양지쪽에 백발을 날리며 조용히 피여나는 우리 할머니 같은 꽃이랍니다. 화사함과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봄마중을 나온 꽃이랍니다. 해마다 청명을 계기로 산에 가면 지팽이도 아니 짚고 묵정검불을 헤치고 나온 호호백발의 꼬부랑할머니- 할미꽃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코등이 찡해오군 하는 것은 아마도 봄이면 봄마다 어김없이 무덤을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미꽃의 꽃말이 ‘슬픈 추억’이기 때문이 아닌가 봅니다. 해동의 들판에서 아기 잔디가 실눈을 뜨고 파아란 손을 내밀 때 자주색 등롱을 들고나온 할미꽃, 어쩌면 돈 벌러 간다고 먼 곳으로 떠나간 자식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시는 년로하신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나 방불합니다. 그래서인지 허리 굽은 은발의 천사를 만나면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지는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제비꽃
아장거리며 다가오는 봄을 마중하러 나갔다가 시골을 떠난 후 30년간 잊고 살았던 제비꽃을 만났습니다. 아파트 정원의 잔디밭에 날아온 제비꽃이 참으로 오래만이라고 반가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였습니다. 하늘을 날아예는 제비모양의 꽃, 강남제비 돌아오는 삼짇날에 핀다고 제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 제비꽃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키를 낮추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보라빛의 작은 꽃입니다. 제비꽃은 꽃말 그대로 성실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위선과 교만을 삼가하는 겸양의 꽃입니다. 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가냘픈 꽃을 나의 스마트폰 사진방에 모신 다음 표본을 만들려고 한송이 꺾으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시책에서 본 ‘꺾어도 후회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되는 제비꽃’이라고 쓴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가 떠오른 것입니다. 비록 작은 풀꽃이긴 해도 겸양의 힘으로 이 봄에 태여나 자신의 한자리를 굳건히 지켜가는 사랑스러운 제비꽃! 나는 이런 제비꽃과 이웃하여 이 봄에 날마다 만나서 보라빛인사를 나누는 친구가 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문화/공연
마흔넷의 화이트데이
이웃해 있는 슈퍼집 아주머니는 좋은 분이셨는데 말이 좀 많은 듯 했다. 항상 매장의 문을 잠그지 않고 잠간 뛰여갔다나오다나니 2년이 거의 되였지만 간단한 인사 외엔 나는 아주머니와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매장에서 고객들 상대로 많은 말을 하다보니 슈퍼까지 가서 떠들어댈 힘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말 많은 아주머니를 가까이 하기 꺼려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안녕하세요"만 반복하며 거의 2년을 마주쳤고 "요즘 장사는 잘 되나요?" 등 공중에서 헛도는 영양가 없는 말들을 간단히 주고받으며 별일없이 무난하게 지내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매장에서 나란히 두번째 봄을 맞게 되였고 그동안 익숙해진 덕분인지 봄이 와서 좋아지는 기분 탓인지 대화는 한두마디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매장에 놀러 온 딸을 데리고 과자 한통 사주려고 들어갔는데 호기심 많으신 아주머니가 물어보신다. "누구야? " "딸이죠." "어머나, 이렇게 큰 딸이 있었어?" "그럼 자기는 몇살이야? " "도대체 몇살에 낳은 거야? " 대답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에 아주머니는 어느새 총알 같은 질문을 참 많이도 던졌다. 나는 시끄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일일이 기계적인 대답을 끝냈다. 항상 많이 움직이고 관리를 해왔던 덕분에 난 다행히 나가면 내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차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뒤로 아주머니는 내가 물건 사러 들어갈 적마다 어떻게 그렇게 큰 딸이 있을 수 있냐며 몇살에 낳았는지 알려줬음에도 그냥 물어보신다. 그 표정은 마치 내가 어느 나이 많은 딸이 있는 령감에게 시집이라도 온 듯이 살짝 무시하는 눈치였다. 차츰차츰 나는 아주머니와는 영양가 없는 말 마저 줄여갔다. 호기심이 많은 아주머니지만 나의 무표정을 눈치 채고 더는 나를 잡고 호적조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나 아들이 슈퍼에 들려서 물건을 살 때면 꼭 붙잡고 "넌 어느 학교에 다니니?" "넌 어디에서 태여났니?" 등등을 꼬치꼬치 캐여물으신단다. 심지어 "아빠는 머하시니" 까지… 남편이 두달간 중국출장을 갔을 적 출장 갔다는 걸 아들 입에서 들었을 때부터 아주머니는 또 신이 나서 나를 잡고 국정원다운 심문을 시작했다. "남편은 중국 갔다며?" "머하러 갔어?" "사업은 잘 된대?" "왜 안 들어와? " 마치 남편이 나를 아주 버리고 어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듯이… 이번엔 난 그 동정의 눈길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내가 그 아주머니에게 우리 부부가 아침 저녁으로 통화를 얼마나 길게 하고 정이 얼마나 좋다는 것까지 확인시킬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필요한 간식을 사러 더 자주 슈퍼로 들낙거리게 되였다. 하루는 남편이 애들과 함께 슈퍼에 들리게 되였다. 아주머니는 애들을 바라보며 "아빠야?" "중국 갔다더니 오셨어?"라고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 물건 사러 간 딸을 붙잡고 "아빠는 안 간대?" "일은 잘 된대?" "아빠는 도대체 몇살이야?"라며 또 물음을 늘여놓기 시작했단다. 게다가 하필이면 딸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대답하고 나온다는 게 그만 아빠의 나이를 거꾸로 말해버렸단다. 사들고 온 빵을 베여먹으며 딸은 한참을 걱정했다. "아주머니가 나만 보면 말을 많이 하셔… 전엔 엄마 나이를 물어보며 엄마가 너무 젊어서 좋겠다 했는데 오늘은 또 아빠 나이를 물어보셨어. 근데 내가 빨리 나오려고 말하다 거꾸로 말한 거 같애…" 우리의 나이가 그 아주머니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였기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상관없지 않니? 젊게 보면 좋지 뭐." 우리는 그 후에 닥칠 일은 예상하지 못한 채 웃고 말았다. 그날은 마침 3월 14일 화이트데이였다. 토끼인형을 선물로 받고 싶었던 나는 토끼인형을 사달라며 남편을 이끌고 매장으로 갔다가 핑크색 토끼인형이 다 팔린 걸 보고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오게 되였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느라 쵸콜렛을 사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우리는 슈퍼에 나란히 들어서게 되였다. 처음으로 둘이 슈퍼에 들어서는 걸 보며 아주머니는 우리를 엄청 반기셨다. 지난 번엔 내가 늙은 령감이랑 사는 듯이 의심하더니 이번엔 젊고 괜찮은 남편을 보고 뭐라고 말할가? 남편은 밖에 놓은 진렬대에서, 나는 집안에서 각각 고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밖을 쳐다보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왔구나, 둘이 같이 다니는 걸 처음 보네. 남편이 도대체 몇살이야? 젊어 보여." 나는 별 생각없이 남편의 나이를 대답해줬다. 아주머니가 "에이- 자기랑 몇살 차이야? 내 보기엔 열몇살도 더 어려보이는데?" 하면서 빈정댄다. 아뿔싸! 그랬었지. 우리 딸이 아빠 나이를 거꾸로 말했었다 그랬지.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네. 젊어보여요, 원래 동안이라." 나오려는 찰나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였는데 이번엔 웬걸… 저런… 내가 진짜 열몇살 어린 남자랑 부적절한 관계라도 있는 듯이 온 얼굴에 의심의 표정이 한가득 쌓인 것을 발견했다. 나는 갑자기 쵸콜렛을 사러 슈퍼에 들린 것이 너무 후회됐다. 평소 나는 매장에 있을 때면 필요한 보습제품과 썬크림 외엔 아무 것도 더 바르지 않는다. 그래서 화장하고 다닐 적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아주머니 말처럼 8개월 차이인 남편보다 내가 8년도 아닌 10몇년씩이나 많아 보이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무언의 메세지를 내게 보내며 내 입에서 열몇살 차이가 나는 어린 남자랑 산다는 대답을 듣기 위해 애를 썼고 그 순간 나는 수많은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그 얼굴을 마주하는게 너무 무서워 도망치 듯 슈퍼를 나와버렸다. 매장으로 들어온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바로 따라와 나를 위로해 줄줄 알았던 남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구프게 웃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례의를 갖추어서 아주머니를 사모님이라 불러드리며 지내왔으나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상처만 줬던 것 같다. 처음에는 딸 있는 나이 많은 령감하고 사는 녀자 취급을 하다가 후엔 남편에게 버림 받은 불쌍한 녀자 취급했고 지금은 나이를 제대로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어린 남자와 사는 줄로 의심한다. 나는 갑자기 동사무소로 달려가서 혼인관계증명서를 떼오고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사진액자를 둘러메고 와서 보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다 나는 곧 마음을 눅잦혔다. 남의 말 한마디에 흔들려 번잡하고 수다스런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평정심을 무너뜨릴 필요는 없지 않는가? 혼자서 실컷 연구하시라지. 한국에 그 많은 슈퍼가 몇발자국마다 한 집인데 내가 오른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가면 되는 일이다. 길은 자신이 정하는거다. 하찮은 일에 신경쓰고 화낼 바엔 그 시간에 더 유익한 일을 많이 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젠 밉던 아주머니가 더는 밉지 않고 고맙기까지 했다. 내가 타인의 입까지 어찌 컨트롤 할 수 있을가. 마치 날아오는 미세먼지들을 미처 피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뿌연 먼지들을 맑은 공기로 정화시켜 날려보내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그 어떤 억측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는 것 또한 마흔넷의 내가 응당 가져야 할 여유가 아닐가. 나는 뒤늦게야 헐레벌떡 앞에 나타난 남편의 손에서 해마다 조금씩 커지는 꽃다발을 넘겨받고 가겹게 그 향기를 맡아보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슬며시 올라가는 나의 입꼬리를 따라 올라가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마흔넷의 화이트데이를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공연
박문희 하이퍼시집 출간식 개최
출간식에서의 박문희(첫줄 가운데) 29일, 박문희 하이퍼시집 《강천 려행 떠난 바람 이야기》의 출간세미나가 연길에서 있었다. 행사는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길림신문사, 《도라지》잡지사, 《송화강》잡지사에서 주최했다. 시인과 평론가 약 40명이 출간세미나에 참석했다. 《강천 려행 떠난 바람 이야기》는 제1부 풍구의 바퀴가 서면 수벌은 죽는다, 제2부 꿈지럭 꿈지럭 확대경 속으로, 제3부 다사한 허공에 말뚝을 박고, 제4부 하늘을 위하여 종이 울린다, 그리고 장시 ‘강천 려행 떠난 바람 이야기’로 나뉘여졌으며 도합 82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평론가 김룡운은 세미나에서 “박문희 시인은 시창작과 시학리론연구를 병진하는 시인”이라고 하며 몇수의 시를 해부했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소개에 따르면 해당 시집은 연구회에서 출간한 5번째 하이퍼시집이다. 연구회는 해마다 2,3차의 시연구회를 갖고 두달에 한번씩 시살롱도 조직하며 윤동주문학상과 리상화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박문희는 1950년 룡정시 토성포에서 출생해 1985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선후로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에서 근무했으며 《길림신문》 고급편집, 부주필을 력임하고 2010년에 정년퇴직했다. 2016년에 《연변일보》에 시 를 발표했으며 2017년, 시 으로 제4회 윤동주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리련화 기자